[윤유진의 청년의 눈]

[청년칼럼=윤유진]  

"유토피아라는 단어에 항상 긍정적인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사회를 뜻하는 한편 희망 없는 비현실적 이상을 뜻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토머스 모어가 1516년 발표한 <유토피아>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마 후자의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어 ‘οὐ(없다)’와 ‘τόπος(장소)’를 합성한 이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란 단어는 우리는 완벽한 사회를 꿈꾸지만 그런 사회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함축한다. 그렇지만 이 분명한 경고를 무시하고 모어의 책에 혹해 자신의 판타지를 현실로 바꾸려 한 이상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딜런 에번스, <유토피아 실험> 40-41p-

위의 인용문을 통해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목이 표방하는 것처럼 ‘유토피아’가 사실은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사회과학에 속한 전공을 공부하다 보면 수많은 사회 문제, 다양한 정치 이념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는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임이 자명하다. 옳은 주장은 무엇이고, 또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필자도 잘 모른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사상이나 입장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어떤 현상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함도 아니다. 다만, 이렇듯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는 가운데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과거 어느 시대에는 전제군주제가 주류 정치사상이었던 적이 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의사결정을 하고, 백성들은 이에 참견할 수조차 없이 순응하는 그런 구조를 현대 사회에서 감히 상상이나 해 볼 수 있는가? 하지만, 그 시대에는 그게 당연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인정할 수 없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그런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 즉 유토피아였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유토피아는 변한다.

픽사베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또 다른 예로 들어 이러한 유토피아의 다양성을 설명해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사회주의를, 어떤 이는 자본주의를 이상적인 사회경제체제로 여긴다.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회가 구축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디에나 사각지대는 있는 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경쟁을 통해 서로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순기능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를 가져오며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공평하게 일하고 공평하게 부를 분배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근로 의욕을 고취시키기는 힘들며, 경쟁을 통한 기술과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듯 어떤 사상이건, 어떤 체제이건 간에 그 안에는 사각지대가 반드시 존재한다.

전제군주 봉건제 시대를 거쳐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유토피아에서는 물론 이러한 사각지대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유토피아를 부정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세워왔는가? 보통은 그렇지 않다. '법의 정신'의 저자 몽테스키외의 말처럼 인간은 최악을 두려워하여 차악을 선택하고, 최선을 의심하여 차선에 머무른다. 그렇기에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점을 조금씩 고쳐나가며 그 프레임 안에 머무르기를 택하지, 완전히 뒤집어놓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잡음이 발생한다.

최근의 광화문 시위는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니부어가 말한 집단 이기심이 더해져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의 행위는 결코 옳다고 치부될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의료진들의 지난 반년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고, 자신과 관련이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감염의 위험성과 펜데믹의 공포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니부어는 인간이 개인일 때에는 선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지만, 집단이 되면 혼자일 때 발휘하지 못했던 용기와 이기심을 가지게 되며, 이는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되는 형태로 발산된다고 말한 바 있다. 광화문 사태와 같은 이기심의 발현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특히나 이들처럼 사회 전체의 이익의 합에 아주 큰 악영향을 미치는 형태로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은 모두 위험한 존재인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부동산 정책이나 교육 정책에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유토피아라 여기는 이상이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그렇게 바뀌지 않을, 지금 그대로의 사회가 유토피아라고 생각하여 강력하게 정책에 반대하는 것일 수 있다. 앞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예로 설명했듯, 각자의 이상에는 반드시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수혜자가 있으면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만이 완전무결하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그리고 그 이상이 되어 다수의 집단으로 변모하는 순간 니부어가 말한 집단 이기심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유토피아에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 유토피아는 더이상 유토피아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토피아를 처음 이야기했던 토마스 모어도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고. 앞의 인용구를 다시 한 번 읽고 와 보자. ‘그렇지만 이 분명한 경고를 무시하고 모어의 책에 혹해 자신의 판타지를 현실로 바꾸려 한 이상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유토피아 실험>은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다 좌절하고 정신병에 걸렸던 저자가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는 그 행동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후회하는 책이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꿈꾸는 이상사회가 없다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고쳐나가려는 노력도 없을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유토피아를 꿈꿔도 좋지만, 동시에 유토피아가 없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순되는 두 명제를 동시에 마음에 새겨야만, 집단 이기심으로 사회를 혼선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유토피아가 있다. 시대에 따라서 유토피아의 형상은 계속 변한다. 필자의 유토피아는 코로나 없이 친구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는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코로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버리면, 개인 방역에 더욱 신경 쓰면서 그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두 '모순 명제'의 합은 더 나은 방향으로 유토피아를 꿈꾸게 해주는 촉진제일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이상사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유토피아를 꿈꿔야 한다. 유토피아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윤유진

정직한 눈으로 사회를 들여다보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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