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ytn뉴스 유튜브 영상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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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박정애 칼럼니스트]  7월 7일 수요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첫 지하철을 탔다. ‘서울애니멀세이브’에서 초복(初伏) 대비 비질(Vigil)을 할 장소로 정한 경기도 북부의 한 도계장 앞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거의 세 시간 걸리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라 비질 소모임 원들과 매달 정기적으로 다니는 소, 돼지 도축장 역시 우리 집에서 두 시간 반 정도 먼 거리인 경기 남부지역에 있다.

나는 원래 나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 먼 곳에 가는 것은 질색인 편이라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 정도 시간을 감수하고 만나러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랬던 내가 길고 단단한 새로운 축(軸)을 만드는 열정적인 심정으로 경기도 남북부의 도살장을 찾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마음이 항상 도살장 앞에서 만난 동물들의 모습, 특히 그들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다. 크기와 색깔에 상관없이 마주치는 순간 마음을 사로잡는 숨 쉬는 존재의 눈동자. 하지만 죽은 자의 눈동자는 공포 그 자체라는 것을 머리 잘린 소의 눈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외면하지 않는 것을 넘어 직시하고 기록하고 알리고 끝내는 축산 동물에게 행해지는 이 맹목적인 폭력의 시스템을 멈추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고 그 출발선이 바로 비질(Vigil)이라는 것을. 그 깨달음으로 인해 바야흐로 나는 비질(Vigil)이라는 광야길에 합류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비질(Vigil)에 나설 때마다 내게 묻는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하나의 유전자처럼 새겨져 버린 인간중심주의라는 축(軸)을 내던지고 종 평등주의라는 새로운 자전축(自轉軸)을 회전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사진=박정애시인 제공
사진=박정애시인 제공

서너 번의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계장을 가는 그 긴 여정 속에서 나는 6월 25일에 찾아간 돼지와 소 도축장을 떠올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축장 앞에 해사하게 피어 있던 접시꽃이 아른거렸고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가 저절로 연상되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암으로 죽은 아내를 옥수수밭에 묻고 그녀에 대한 사랑과 애도의 마음을 절절한 감성으로 담은 서정시. 그 울림은 당시 많은 여성의 눈물샘을 자극한 나머지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접시꽃이 죄 없는 죄인들이 끌려 들어가는 사형장 앞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나란히 서 있는 돼지 도살장과 소 도살장 뒤에는 축산물 도소매 센터가 들어서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도 가느다랗고 긴 줄기에 층층이 피어 있는 접시꽃이 길가에 죽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례식장 앞에 쭉 서 있는 근조 화환처럼 보였다. 고작 한 달에 한두 번 와서 진실의 증인이니 어쩌니 하며 생색을 내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라는 듯이 빨갛고 하얗고 연분홍인 그 접시꽃들은 자신의 생애 가장 아름다운 매일매일의 순간을 그렇게 증인의 꽃으로, 애도의 꽃으로 활짝 피어 있는 것이다.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 = 박정애 시인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 = 박정애 시인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에는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으로써 얻은 슬픔의 씨앗을 더 많은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연대하는 마음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 시에 담겨 있었다.

그 열망을 사람들이 아닌 생명으로, 그중에서도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전자를 지녔기에 인간과 가장 비슷한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 소 닭 돼지와 같은 동물에게로 확장하면 안 될까. 접시꽃 당신이 접시꽃 소, 접시꽃 돼지 그리고 접시꽃 닭으로 확장되기를 바라는 가운데 어느새 어린 닭의 생명을 빼앗아 제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곳. 공장이라 불리는 도계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10층짜리 케이지 안에 실려 이제 곧 산채로 목이 잘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작고 까만 눈동자들. 허기진 채 길고 무더운 여정에 지쳤는지 부리를 꼭 다물고 삐악거리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 시무룩한 표정들. 그 어린 생명이 메일 수십만 명씩 죽임을 당하다 복(伏)날이 가까워지면 두 배, 세 배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 애잔한 잔상과 어김없이 찾아오는 무기력감에 순간순간 울먹이게 되는 비질 이후 어느 날 나는 목이 잘리고 항문이 뚫린 모습의 작고 여린 몸뚱이가 한 마리 영계백숙으로 포장되어 나란히 나란히 진열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장보기를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들어선 치킨집에 빼곡히 들어앉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 역시 그렇게 흥겹게 치맥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이제 남은 날들을 축산동물의 눈으로 지켜보는 또 다른 증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윤리를 세우고 내가 세운 윤리의 축(軸)을 꼭 붙들고 새로운 자전을 이어갈 것이다.

누구라도 윤리적 주체자가 되기를 꿈꾼다면 함께 비질(Vigil) 가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 그곳에서 동물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순간 나의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암막 커튼이 일순간 걷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의 동료 피조물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며 어떻게 천국을 꿈꿀 수 있는가 하는 죄의식과 동시에 인간중심주의라는 감옥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독과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나 무한성을 향해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 바로 고통의 연대를 통해 천국을 침노하고 싶다는 경이로운 감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비질(Vigil)이란 함께 도살장을 방문하여 현 육식주의 사회가 가리고자 하는 ‘살육의 시스템’을 목격하고 기록한 후 이를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여 폭력적 현실의 증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박정애시인
사진=박정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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