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 성당=반병희  칼럼니스트
공세리 성당=반병희 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반병희 칼럼니스트] 공세리 성당은 아름답다.한폭의 수채화라는 데 동의한다.수령 350년이 넘은 나무가 4그루나 있고 100년 넘은 것은 부지기수다. 그들이 뻗어낸 가지들과 이파리들은 각각이 군락이다.게다가 120년이 훨씬 넘은 고딕식 성당이 중심 언덕에 앉혀 있으니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봄날의 화사한 꽃 무리, 여름날의 울창한 나뭇잎도 좋지만, 가을날 낙엽이 이리저리 떼를 지어 구르면 앞뜰은 캔버스로 변한다.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힐 만하다.

공세리 성당을 ‘마침내’ 찾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아니 수십 차례 이상 기회가 있었지만 아껴 두었다. 어린시절 박하사탕봉지를 선물 받은 뒤 제일 예쁜 무지개 색을 아끼고 아끼다 맨 마지막에 먹었던 것처럼.

고풍스럽고 웅장한 외형만큼이나 성전내도 정갈하다. 예수, 성모상은 물론이고 모자이크도 과하지 않게 은은했다. 유리 창을 타고 넘어오는 햇살이 적막을 희롱할 뿐이다.성당 안과 밖이 빚어내고 있는 완벽한 조화다.

하지만 내 눈길을 오랫동안 멈추게 한 곳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성당 언덕 왼쪽의 순교자 현양비, 표석이다.천주교가 이 지역을 통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갈 무렵, 이 지역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조선조정의 탄압으로 순교한 32명을 기리는 묘비다.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이마리아 조모니카 등등의 버젓한 이름 말고 이씨부인 등 순박하고도 토속적인 명칭이 눈에 띈다. 신유 기해 병오 병인의 천주교 4대 박해 때 1만 여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는 바, 상당수가 이 곳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나왔다. 양반과 상민,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 남자와 부녀자, 주인과 하인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이 일대 많은 주민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순교는 죽음이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그들에게 신앙은 소중했다.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의 인도를 따르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과 맞바꿀 만 했다. 그게 영원히 사는 길이기에. 예수 조차도 사흘 만에 부활했음을 보여주었으니 얼마나 가치 있는 선택이었겠는가?

탄수화물과 단백질 덩어리의 육신을 포기한다는 것, 다시 말해 순교(죽음)는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예수의 길을 따르겠다는 순교자로서의 선택 말이다. 그 만큼 그들은 생물학적 죽음보다는 신앙의 영생을 중시했다. 죽음 자체(순교)는 울며불며 매달려야 할 절대적 가치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은 흔히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자기결정권이 원천적 배제된 것으로 관념화 돼왔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종교나 사회 윤리에 의해 가장 큰 금기 사항으로 간주돼 왔다. 연명의향서, 즉 인공호흡기 등에 의존하는 생명연장치료거부권 행사를 제외하면 자기 생명 결정권은 원칙적으로 논의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통제, 조정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개인의 존엄성과 존재론적 가치는 새롭게 구성돼야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어에서는 궤를 같이 하지만, 공세리에 묻힌 순교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런데 꼭 그럴까?

나이가 먹은 탓인지 요즘 ‘죽음’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먼저 떠올린다.
한국의 부모 대부분은 자식들 때문에 하루하루를 죽어 가고 있다. 나도 내 부모께 그리했고, 성인이 된 내 아들 또한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엔 좋은 인연도 있지만, 잘못된 만남도 많다. 상당수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어야 하는 경우다. 이런 관계에서는 죽음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죽음으로 곧 바로 잊혀지는 휘발성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피투성(被投性ㆍ Being thrown)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나는 연로하셨던 부모님에게는 아주 ‘못된’ 자식이었고 불효자였다. 이로 인해 부모님께서 눈을 감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힘들어 했다. 나는 부모님의 죽음을 무겁게 했다. 지금도 나는 막내 아들인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으신 어머니를 종종 생각한다. 왜 장남도 차남도 아닌 막내 아들을 마지막으로 선택하셨을까? 내가 몹시 미더워서 였을 게다.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심지어 입관할 때 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누님이나 형님들이 흐느낄 때 나는 그저 부모님의 얼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울 수가 없었다. 부모님에게 눈물을 보일 자격이 나에게는 없었다. 내가 우는 것 자체가 마지막까지 부모님을 속이고 불효를 저지른 것이기에 울지 않았다. 참았다.

그러나 그 이후 저녁 늦게 퇴근할 때면, 산소를 찾을 때면, 비슷하게 생긴 다른 노인들을 지하철에서 만날 때면 아직도 눈물을 흘린다. 마음 속으로 항상 울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정리하는 순간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을, 그들과의 이별을 아직 온전히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없는피투성이로서의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거꾸로 아버지가 된 지금, 나의 아들과의 관계는 과거의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족관계를 포함해 사람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교육’이라는 말로 치환된 ‘순응훈련’(discipline)이 필요한 이유다.잘 교육받은 선진시민으로서 사회적 규범을 이끌어내고,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냈다고 죽음에서 자유로와 지는 걸까? 

인간이 피투성이로 태어나면서부터 안고 가야 할 숙명, 즉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 까지 겪어야 하는 숱한 고통과 과정을 건너 뛸 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은 무척이나 가볍고 찰나적인 것인데, 그에 이르는 과정은 왜 그리 힘든 것일까?이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생에서의 관계는 행복할 때도 있지만 관계 자체가 고통일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화장 뒤 납골 형태로 산소를 만들어 선산에 모신 내 장모님의 경우, 화장장에서 화장을 하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흰색의 뼛가루는 곱다 못해 흐릿한 잿빛 기운이 돌았고, 가루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몇 주 전에 점심, 저녁을 함께 한 활달한 모습은 오간데 없이 적막이었다. 

100g이나 될까? 무게감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밀가루 봉지를 손바닥 위에 앉은 것 같았다. 장모님은 또다른 장모님 세계로 돌아간 것이었다. 다만 내 눈에 보인 것은 그가 이 공간에 남긴 흔적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잠자리가, 나비가 죽은 뒤 가벼운 깃털만 남기 듯이.

죽음은 뒤에 남은 자들의 흐느낌을 완벽한 부조화로 만들어 버리는 침묵이자 공허(空虛)다.
‘왜 저리 슬프게 우는 것일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장모님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혼자서 걷거나 처가 집을 갈 때면, 아내를 볼 때면 마음속으로 장모님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애잔아진다.

죽음은 한없이 가볍다. 심각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가 남긴 체취와 흔적이 오래 지속되느냐 아니냐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몫이다.산 자가 죽은 자를 쉽게 버리면 죽은 자도 쉽게 떠난다. 무형이기에.

따라서 죽음을 가볍게 대하는게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천상병 처럼, 죽음은 잠시 이생에 소풍 나왔다 하늘로 돌아가는 것일 뿐으로 생각하면 편하다. 나이가 들었으니 나이가 든 방식으로 소풍을 가자. 그게 죽음이다. 지치고 힘든 현재의 삶만 생각해도 버거운데, 죽음마저 무겁게 등짝을 짓누른다면 너무 한 처사 아닌가?

죽음을 가볍게 대하기로 했다. 연명의향서가 되든 무엇이 되든. 죽음을 공세리에 묻힌 순교자들 처럼 경우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성질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두 어깨와 가슴을 오늘도 후려치고 있는 삶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면 공세리 성당을 다시 찾아야겠다.

반병희 칼럼니스트=오피니언타임스
반병희 칼럼니스트=오피니언타임스

 

[저자약력]
-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산업부장 및 모스크바특파원 등 역임,  에너지경제신문 사장, 아주경    경제신문 부문대표. 채널A 글로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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