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하루 중 가장 진솔한 시간이다. 그래서 난 가끔씩 새벽녘에 눈을 뜨면 맨 먼저 우리집 옥상을 오른다. 마음을 열어놓기로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가 자꾸만 부끄러워질 때,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 홀로 숨어 지내고 싶을 때, 마음을 닫아두고 싶을 때, 이처럼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하늘과 차단벽 없는 옥상에 올라가 그동안 흠뻑 젖어있던 진상들을 홀딱 뒤집어놓고 마음껏 털어 말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옥상이기 때문이다.
 
두려울 때마다 불안할 때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내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는 기도처인 셈이다. 홀가분한 심정으로 새 하루를 의미 있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새벽 옥상은 언제나 내게 신성하고 고요하다. 그래서 나만의 마음 수련장이다. 아직 잠을 덜 깬 하늘 아래,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가슴을 활짝 열어두는 곳이기도 하다. 이 새벽녘엔 언제나 도심 속 높게 치솟은 교회당의 첨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든다.
 
그 끝에 매달려 붉게 핀 십자가 조명빛이 어둔 길 헤매며 밤새 고통 받아온 그 누군가의 깊은 상처를 위로하는 모습으로 다가올 때마다 자애로운 신앙의 품성을 느끼곤 한다.

이제 서서히 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남서로 둘러쳐진 모악의 정상이 한눈에 들며 그곳으로부터 신령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걸 느낀다.
 
고층 아파트 숲에 가려져 산 아래 부분이 좀 잘려나가긴 했어도, 내 동공 속으로 말없이 끌려 들어오는 모악산의 그 장엄함이 어머니의 신앙처럼 숭고하다. 하늘 서편으론 새하얀 조각구름들이 머무르고 있다. 그 틈새를 막 헤집고 나오는 항공기의 바쁜 비행모습이 의욕적이다.

앞집 옥상의 빨래들은 아직도 마르는 중이다. 벌써 몇 일째 널어놓은 빨래들을 거두지 않고 있다. 혹 무슨 유고라도 생긴 것일까? 괜한 걱정을 해본다.
 
동네 옥상들마다 화분이나 스티로폼 상자들로 꾸며진 간이 텃밭 몇 뙈기들은 거의 가꾸고 있다. 지난 여름 내내, 앞집의 옥상에선 풋풋한 고추와 싱싱한 대파가 주인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 푸른 기운을 뽐내며 자라났었다.
 
그리고 옆집 옥상에는 웬걸 잡풀들만 무성했었다. 저쪽 길 건너편 3층 집은 옥상 활용을 제일로 잘하는 집이다. 그 위에 수목들을 심고 잘 가꿔내어 그림 같은 옥상정원을 만들어 놓고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집이다.

건물의 옥상은 콘크리트 바닥이다. 하지만 그걸 활용하는 주인의 지혜와 관심에 따라 나름대로의 짜임새 있는 기능과 편리한 정서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옥상은 건물의 지붕이면서도 제일 높은 꼭대기의 개념이다. 존엄한 하늘과 맞닿은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옥상을 잘 가꾸고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할 그 이유로도 충분할 테다. 옥상정원에서 식물을 키우면 추위나 더위를 막아주는 건 물론이고 그 지붕의 수명도 3배를 더 연장시킬 수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오래 전 “옥상의 민들레꽃” 이라는 단편소설을 아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스친다. 삭막한 옥상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져 모질게 살아남은 민들레의 끈질긴 생명력 속으로 끌어들인 우리들 삶의 고달픈 인생스토리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
 
이런 발상들이 불쑥 감동으로 일어섰던 것도 결국은 “옥상바닥이라는” 무(無)에서 유(有)를 발견해낸 부단한 노력의 가치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제 곧 일출이 우리 집 옥상에 당도하려는가 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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