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봄에 떠나고 싶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그래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자연은 조금씩 봄의 기운을 보여주고 있다.
고맙고 설레인다.
봄이 오는 기미만 보이면 봄처녀처럼 설레이는 이 느낌은 정작 처녀시절엔 몰랐던 기분이다.
수없는 계절의 왕래를 겪고난 노년에 가까와서야 이러고 있으니... 우습다.
 
이 기분을 몰아서 봄이면 늘 여행 계획을 세우곤 한다.
세상은 넓고 내가 안가본 곳은 많아서
컴퓨터앞에 앉아 다른이들의 여행리뷰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노라면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몰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정작 여행인것인지, 여행을 꿈꾸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여행 날짜를 잡고, 교통과 숙박문제를 정리하고나면
여행지에서 봐야 할 것을 공부한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에 주목해가면서, 그야말로 공부다.
그리고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찾아서 가능하면 일정에 포함시키는 것도 필요한 일이고...
 
대체로 이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여행중이나 돌아온 뒤에도
뭔가 허탈하고 내자신 멍청이가 되버린 듯한 우울감도 들더란 말이다.
 
딸애가 어렸을 때  딸의 방학숙제 삼아 하회마을을 다녀온 적이 있다.
마을은 관광지로 개발된 티가 역력하지만 그런대로 볼만한 것도 많았고
주변에도 여기저기 둘러볼 곳이 많았다.
바로 근처에 병산서원이 있었는데 얄팍한 지식에 도산서원만 찾느라고
그곳을 그냥 지나쳐버렸었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김봉렬선생의 강의가 너무 흥미로워서 이 책을 구입했다.
전 3권. 사진이 아주 좋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종묘와 화성,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경주 양동마을 이야기가 나오는 1권은 역사와 설화까지 곁들여 아주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어서 내게 새로운 경주지방 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다.
또 한가지, 시각적 감동도 없고 이해도 난감하기만 했던 전통 한옥에 대해 새로운 애정을 갖게 하는 관념적 접근이 신선해서 안동지방의 서원 건축을 다루는 3권을 열심히 읽었다.
유교와 서원 건축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병산서원과 만대루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안동과 병산서원은 나의 단골 여행지가 되었다.
봄만 되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그때 떠오르는 곳,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이다.
만대루(晩對樓)의 만대는 두보의 시<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 (翠屛宜晩對)"서 따온 말이란다.
 
 
 
 
성리학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건축물 - 서원.
 
그 중에서도 누각과 정자는 그 자체로 완결된 기능을 갖기보다
자연풍광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다.
그릇은 비어야만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 - 기둥과 지붕밖엔 없이 옆으로 길기만 한 7칸자리 건물.
그러나 누각에 올라보면 앞산과 강물의 풍경이 마치 7폭자리 병풍처럼 펼쳐진다고.
누각은 건물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을 조망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만대루 천장을 보면 기둥 사이를 연결한 보들이 굵기도 크기도 제각각.휘어지고 틀어진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그렇기도 하지만
성리학적 본말론에 의하면 건축의 쓰임새나 컨텐츠가 중요한 것이지 건물의 생김새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하물며 건물에 부가되는 장식이나 색채, 현란한 재료의 사용은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장애물이라 여긴다. 조선시대 조형예술이 쇠퇴한 까닭도 이런 유교적 사상의 영향 때문임은 물론이고.
 
어쨌든 건물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짓는다는 생각.
외부와 단절된 건물 속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을 결합해주는 매개체로서의 건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만대루에 올라 생각해보고픈 성리학적 사고방식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시를 썼다. 병산 서원 만대루에 누워...
마흔살
안도현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랭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쓰레기 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물 한 동이 퍼담을 수 없는 몸, 그 무게 불린 일
병산서원 만대루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와이셔츠 단추 다섯 개 풀자,
곧바로 반성된다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 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바람이 겨드랑이 털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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